임대주택 매입 대금 지연돼도

계약서상 서울시 책임은 없어

인·허가 무기로  슈퍼 을 지위

불공정 조항 고치기보다 악용


#지난해 12월 서울 서대문구의 A재개발 조합의 조합장은 서울시에 민원을 올렸다. 재개발 임대주택 계약을 체결하고도 서울시가 매입자금을 주지 않아 조합이 매달 이자를 물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거액의 손해가 발생하는데도 민원인의 어투가 차분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읍소에 가까웠다. 물론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계약을 어겼어도 서울시는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계약 주체인 조합이 갑의 위치에 있지만, 사실 돈줄을 쥐고 있는 서울시가 슈퍼 을이기 때문에 괜히 심기를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서울시의 임대주택 매입계약서가 갑질 논란에 휩싸였다. 임대주택 매입계약을 체결하면서 지연 지급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대주택 매입대금은 편성된 예산 범위 내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조합은 임대주택 계약체결에 앞서 구청을 통해 매입계정 전년도 6월 말까지 소요예산을 통보해야 한다. 이에 A구역 조합은 절차대로 2013년 6월 서울시에 계약금 257억원과 1·2차 중도금 각 193억원 등 총 644억원의 예산 편성을 요청했다.


이후 A구역 조합은 이듬해인 지난 2014년 7월 30일 임대주택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8월 계약대금을 지급해 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다. 당시 A구역의 임대주택 공정률은 51.5%. 당연히 계약금과 1·2차 중도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임대주택 매입비용 지급을 회피했다. 2014년 예산이 280억원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추경예산을 편성해 지급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로도 추경예산은 편성되지 않았고, 임대주택 매입비용은 계속 지연됐다.


일반적으로 계약서는 계약 내용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체결된다. 만약 과실이 생긴다면 당연히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쪽에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하지만 서울시의 임대계약서는 불공정한 계약 구조로 A구역과 같은 사례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시와 조합이 체결한 임대주택 매입계약서에 따르면 “‘을’(서울시)의 예산상의 사정 등 부득이한 사유로 지급예산 미확보시 ‘갑’(조합)은 지연지급에 대한 손해를 청구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계약을 어겨도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불공정 계약으로 인한 피해는 A구역만이 아니다. 현재 입주를 마쳤거나,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사업장 중에는 수개월동안 임대주택 매입비용 지급이 지연된 또 다른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마포구의 B구역도 시가 수개월간 비용을 지급하지 않아, 수차례의 민원을 제기한 끝에 임대주택 매입비용을 받은 바 있다.


A구역 관계자는 “지키지 않아도 책임지지 않는 계약이 무슨 계약이냐”며 “인허가권을 무기로 조합에 대한 갑질이 도를 넘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갑질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뿐”이라며 “임대계약서에 불공정 조항이 버젓이 있는데도 이를 고치려 하기보다는 악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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