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게 인생길이니 제2의 인생이니 인생2모작이니 운운 하지는 않겠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예기치 않은 순간이나 선택은 갑자기 오기 마련이다. 그 순간 선택하지 않으면 잠깐의 에피소드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 왔다. 한 회사에 입사해서 30년을 꽉 채운 직후에. 물론 그 사이 다니는 중에도 끊임없이 생각과 고민으로 지내왔지만 쉽사리 큰 우산 밑을 벗어나서 비바람 부는 광야로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주변을 보면 특히나 이직이나 전직이 많은 건설회사 업종이라서 여러 회사를 쉽게 옮겨 다니는 분들도 많이 보았고, 아예 나가서 일찌감치 창업을 하거나 전직을 하는 분들을 보았었지만 그건 그냥 남의 일이었다.

간혹 퇴직이나 중도에 이직을 하신 선배 동료들이 그랬다. 그냥 다니던 회사에서 가늘고 길게 다니라고. 대기업 그 그늘과 우산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 나와보면 금새 알게 되고 그간에 보호해주던 보호막이 사라지는 순간 자연인으로서 찬바람을 맞게 되면 후회할 거라고. 대부분 같은 조언을 해주셨다. 일이든 회사내의 인간 관계든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마인드 컨트롤하며 살아가라고.

간혹 아주 간혹 전혀 다르게 말해주는 주변 분도 계셨다. 죽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그리고 나날이 상처받고 내상이 심해지면 참지 말고 나오라고, 새로운 세상이 있고 기회가 있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며 인생은 한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으니 바로 지금 결정해도 된다고, 가보지 않은 길도 가봐야 한다고, 힘들면 잠시 쉬어가라고, 눈물나게 고마운 조언이었다.

회사에 갑작스런 사직을 통보하고 팀장 면담을 하고 그리고 남은 연차를 모두 쓰기 위해 한달 간 휴가를 냈다. 입사 30년만에 가장 긴 휴가 이자 마지막 휴가를. 그리고 훌훌 짐을 꾸려 혼자 지리산 둘레길로 나섰다. 휴가 중에도 여기저기 인사 다니고 사람들 만나느라고 정작 나만의 시간을 쓴 것은 얼마 안됐다. 그래서 둘레길도 다 걸어보지 못하고 3일간만 걸어 보았다. 때이른 봄이고 평일이고 하루는 날씨도 궂어서 사람들이 없는 길을 혼자 걸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걷고 싶었고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고 지나간 시절에 대한 회한과 미래의 불안감을 잠시라도 잊고 싶었다. 그 3일이 소중했고 추억이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지리산 주변에 사는 분들이 벌써 그립다.

대기업이라고 하지만 건설회사 그것도 영업 직군의 일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제대로 알 수도 없는 분야이다. 기술직이 아닌 영업 관리직의 일은 처음부터 낯설고 힘들었다. 출장도 잦았고 몇 달씩 타지에서 먹고 자고 하는 일도 있었고 어디서건 많은 고객을 상대해야 했고 상대방은 나이드신 남자들이 대부분이었고 거칠었고 술이 주종이었고 야근과 휴일 근무가 당연시 되었다. 조직 내부는 내부대로 어디서든 있는 인간관계 갈등, 정치, 인맥 등 다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외부의 시행사, 조합, 관공서, 발주처, 협력사 등등. 무수히 많고 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디까지가 업무이고 어디까지가 인간관계인지도 잘 모를 때도 있었다. 서로 못믿고 때로는 의리를 따지기도 하고 뒷통수를 치기도 하고 감언이설과 면종복배도 해야 하고. 그러고 30년이 지나갔다. 월급쟁이라면 어느 회사이건 그 정도는 다 겪고 사는 일이겠지만 누구나 자기가 겪은 군생활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하지 않던가.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이상 모든 것은 인간 관계이고 경험이 곧 내 자산이고 브랜드였다. 퇴직을 하고 이직을 하는 순간에 그 인간 관계도 다시 정립되고 다시 사람들이 보였고 다시 돌아보게 되었지만, 그 30년의 세월이 나를 여기에 서게 했고 지금의 일을 계속하게 해주었고 그간 배운 경험을 써먹게 해주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지만 처음 접하는 사람은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시작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이고 그게 신입이나 사회생활 첫 출발하는 사람과는 다른 마음이고 인생길 점점 뒤로 물러나는 시기에 무엇이든 새로 시작 한다는 건 참으로 여러가지 마음과 생각들을 복잡하게 뒤틀어 놓는다.

수십억 재산을 쌓아놓고 어디 전원주택에서 텃밭이나 가꾸면서 소일하는 삶을 대부분의 중년분들은 동경 하겠지만, 달랑 집하나 겨우 장만하고 아이들은 아직 한창 커가는 중이고 노후준비는 국민연금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불안한 중년의 처지가 대부분이다. 나도 그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면서 겉으로는 담담한 척 모든걸 초탈한 척 그러면서도 ‘라떼는 말이야’ 하다가 문득 놀라서 입을 닫아버리는 그렇고 그런 속물로, 다시금 새로운 일에서도 여전한 눈치와 몸조심으로 나로 인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방해꾼이 되지 않으려 조심조심한 하루를 보내본다.

우연한 기회에 고맙게도 잠시 정비사업 강의를 맡게 되어서 말주변도 없고 두서없는 강의를 정신없이 하게 되었는데, 늦은 시간에 멀리 지방에서까지 다녀가면서 강의에 집중하는 수강생들을 보면서, 그리고 희끗희끗한 노년의 어르신들이 맨 앞줄에 앉아서 한자라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가르치려 온 게 아니라 그분들에게 오히려 그런 자세와 태도를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공부하는 젊음은 아름답습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공부하는 분들은 모두 젊은 분들이라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 무슨 공부이든.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배운 바를 익히며 살아가는 긴 여정이 아닐까 한다. 서로의 경험을 들려주고 나를 고치면서 그렇게 같이 살아가는게 아닐까 한다.

도시정비의 산증인이시고 산지식이신 존경하는 김조영 변호사님의 부탁으로 올해부터 감히 능력은 안되지만 한국주택정비사업조합협회의 정책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2021년도는 코로나19 사태로 정책위원님들 얼굴도 못 뵈고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어서 아쉬웠지만 다가오는 새해에는 예전처럼 활발한 토론과 연구하고 자문하는 협회의 본모습으로, 저도 그 일원으로 작은 보탬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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