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고에 이어 대한민국 국회를 다시 언급하게 된다. ‘대화’와 ‘타협’을 갈등해결의 금과옥조로 삼는 국회조차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의제에 관하여는 심심찮게 스펙타클한 광경을 연출하곤 한다.


 예전 같았으면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후진성에 대해 한바탕 걸쭉한 욕이나 퍼붓고 속을 달래겠지만 직업상 조합의 실무에 자주 관여하다 보니 국회의 난장판조차 조금씩 그 속내를 이해하게 된다.


한 발짝 떨어져 방관하는 국외자의 예상과는 달리 집단적 의사결정 시스템의 정상 작동은 실로 녹록치 않은 과제임을 잘 알기 때문일 터이다.


국민을 대신하여 국가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일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인 직업정치인의 세계가 이러할진대 단체적 의사결정의 경험이 일천한 조합원들로 구성된 조합원총회는 말해 무엇 할까. 경험치의 차이만이 아니다.


국회가 국민을 ‘대신’해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대의기능을 담당하는데 그치는 반면 조합원총회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안건을 ‘직접’ 결정한다는 본질적 차이까지 아울러 고려해보면 조합원총회에서의 갈등이 보다 원초적이고 격화된 형태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주택시장이 한창 뜨거웠던 시기에는 ‘빨리 지어서 빨리 판다’는 지상의 목표 덕분에 이 같은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저조한 사업성을 책임질 희생양 만들기 차원의 임원해임 총회가 빈번한 시장 상황에선 잠재해있던 갈등구조가 여과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임원해임 총회는 대게의 경우 조합원들의 발의에 의해 소집되어 진행되는 데 해임대상이 된 임원이나 해임에 반대하는 조합원들은 총회 장소에 입장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때로는 기습적으로 총회장소를 변경하면서 해임에 반대하는 조합원들에게는 통지조차 생략되기도 한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해임에 필요한 정족수만 갖추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현상이겠지만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다수결 그 자체만이 아니라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절차적 과정’에도 주목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해임결의를 이루기까지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도 문제이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더욱 우려스럽다. 해임결의의 효력 여부가 법원에 의해 판가름 나기도 전에 기존 임원들을 조합업무로부터 격리하기에 급급하여 해임총회를 주도하였던 일부 조합원들이 조합사무실을 무단 점거하여 강제로 조합 살림을 접수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아무리 임원 해임결의가 적법하더라도 조합재산의 관리 등 조합의 집행업무를 일부 조합원들이 임의로 수행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무릇 조합업무의 집행권한은 정관 혹은 법원의 결정에 의하여 선임된 직무대행자 등 적법절차를 거친 자에게만 인정되는 것이다.


심지어 적법한 권한을 인정받은 자라 할지라도 해임된 기존 임원들이 직무인계를 거부할 경우 법원의 재판 등 절차를 거쳐 공권력의 힘을 빌어서야 비로소 조합재산에 관한 점유권을 넘겨받을 수 있을 뿐이다.
해임결의 과정과 그 이후 벌어지는 이 같은 위법상황은 역설적으로 조합임원들이 주도하는 조합원총회 일반의 절차적 정당성을 돌아보게 한다.


조합임원들이 주도하는 조합원총회가 조합원들의 자유로운 의견개진과 의결권 행사를 충분히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해임결의의  위법성에 대해 뒤늦게 목소리를 높인다 한들 귀담아들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이중 잣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단체적 의사결정 시스템의 정상적 작동은 언제까지나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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