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공자 계약해지의 적법성 판단 시에 ‘손해배상에 대한 의결 여부’가 주요 쟁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과거에는 총회에서 시공자와의 계약해지를 의결하면 시공권이 박탈되고, 시공자는 계약해지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시공자 해지과정에서 손해배상 관련 의결이 없었다면 계약해지 자체가 무효라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시공자 계약해지를 위한 총회를 진행할 경우 손해배상 책임 여부와 손해배상액 규모 등에 대해 설명하고, 사전에 손해배상 의결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 전문변호사들은 시공자 계약해지 시 손해배상에 대한 의결까지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시공자 지위와 손해배상은 사실상 법률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그래픽=홍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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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시공자 계약해지→손해배상→정비사업비 변경… 조합원 총회의결 있어야 유효”


최근 법원이 시공자와의 계약을 해지하면서 손해배상에 대한 총회의결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해지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시공자 계약해지와 관련된 가처분은 물론 본안 소송에서도 동일한 법리가 적용됐다.

법원의 논리는 이렇다. 시공자와의 계약을 해지하면 조합은 시공자에게 손해배상을 할 책임이 발생할 수 있다. 손해배상금을 지불하게 되면 정비사업비의 변경이 불가피하다. 현행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상 정비사업비의 변경은 총회의결 사항이다. 따라서 정비사업비의 변경을 초래하는 시공자 계약해지를 결의하기 위해서는 손해배상금에 대한 의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서울고등법원도 손해배상 의결을 거치지 않은 시공자 계약해지 결의는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6일 서울고등법원 제20-2민사부(재판장 홍지영)는 신반포15차아파트 주택재건축조합으로부터 시공자 계약해제 통지를 받은 대우건설이 조합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시공자 지위를 다시 인정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시공자 계약해제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선행 절차로 해제와 관련된 손해배상에 관해 총회 의결이 필요하다고 봤다. 하지만 당초 조합은 계약해제에 대한 귀책사유가 시공자인 대우건설에 있다고 판단해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총회에서 계약해지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이나 불이익을 묻는 조합원의 질문에 대해서도 판단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민법에 따라 일방적으로 도급계약을 해제하는 경우 손해를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손해배상에 관한 의결을 하지 않아 무효라고 판단했다.

지난 8월 광주 광천동 재개발조합도 총회에서 시공자 계약해지를 의결한 후 해지 통보를 했지만, 도급계약을 임의해제하면서 손해배상액 등을 총회에서 결의하지 않아 효력이 없다는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지난 7월 대구 노원2동 재개발에서도 유사한 내용의 입찰절차진행금지 등 가처분이 인용됐다.

▲시공자 해지 시 손해배상 의결 불가피… 법률전문가 “계약해지와 손해배상 별개로 봐야”


시공자 계약해지 시 손해배상 관련 총회의결을 거쳐야하는 전제조건은 분명하다. 조합이 시공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법원도 손해배상 총회의결을 해야 하는 근거로 민법 제673조에 의한 임의해제인 경우에는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총회의결을 거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시공자에게 해지의 귀책사유가 없는 상황에서 조합이 일방적으로 해제권을 행사하는 경우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을 거꾸로 해석하면 시공자에게 해지의 귀책이 있다면 조합은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손해배상에 대한 총회의결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손해배상 비용이 발생하지 않으면 정비사업비의 변경 사유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조합이 시공자의 계약해지 사유로 시공자의 귀책을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시공자는 조합의 일방적인 계약해지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조합에서는 손해배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계약을 해지하기 때문에 굳이 손해배상과 관련된 총회의결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법원 판결의 추세를 보면 손해배상 총회의결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서울 신반포15차와 광주 광천동, 대구 노원2동은 모두 시공자의 계약 불이행이나 사업지연 등으로 계약을 해지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시공자의 귀책을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의결을 거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비사업 법률전문가들은 법원의 판단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시공자 해지 이후 손해배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손해배상에 대한 총회의결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법을 확대해석한 것이란 주장이다.

법률사무소 국토의 김조영 대표변호사는 “조합의 손해배상 책임 여부는 소송을 통해 결정되는데, 아직 발생하지 않은 손해배상에 대해 사전에 총회의결을 받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며 “이번 법원의 판결은 사실상 시공자와의 계약을 해지하려면 손해배상에 대한 의결을 받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조운의 박일규 대표변호사는 “계약해지에 따른 손해배상과 시공자의 지위 여부는 법률적으로 별개의 관계로 봐야 한다”며 “향후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하면 조합원들이 정비사업비 변경을 의결하면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데도 시공자 지위와 연관해 판단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 재판부에서는 계약해지 시 손해배상액 규모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정보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며 “법원에서도 손해배상금액에 대한 판결이 다른 상황에서 조합이 이를 예측하라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심민규 기자 smk@ar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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