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쯤으로 기억한다. 지방에 소재하는 어느 재개발 조합이 시공자 해지 안건을 의결했다.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중소 시공사보다 브랜드 파워, 실적과 경험에서 절대적 우위를 보이는 도급 순위 상위의 건설사를 선호하는 조합원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조합원들로서는 합리적 선택이었겠으나 해지를 당한 건설사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컸을 것이다.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 과감하게 수주를 결정해 준 지역 시공사 덕분에 사업 진행의 기대를 품을 수 있었을테니 고마운 일임은 분명하지만 조합의 의사결정은 감정이나 의리보다 이윤동기에 의해 좌우된다.

어쨌거나 기존 시공사는 해지 결의가 부당하다며 사안을 법원으로 가져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합은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총회를 위한 절차적 규정들을 모두 준수했고 나름대로 계약을 해지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사유 없이도 도급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민법 규정이 최후의 보루처럼 버텨줄 것이라 믿었다.

법원의 결정은 의외였다. 해지 결의가 무효일 수 있어 그 효력을 정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가 결정적 하자로 거론한 것은 조합원들에 대해 “손해배상 위험의 고지가 없었다”는 것.

민법이 특별한 사유 없이도 도급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맞지만 그 해지에는 손해배상이 수반되기 때문에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 위험에 관해 충분한 고지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결의 무효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논리였다.

패닉에 빠졌던 조합은 이내 재판부의 결정 취지대로 조합원들에게 해지에 따른 손해배상의 위험을 고지한 후 총회에서 재차 해지를 의결함으로써 시공자 해지의사를 끝내 관철했다.

최근 다른 지역에서 같은 논리에 근거한 법원의 가처분 결정이 다시 등장했다. 손해배상 책임에 대한 고지가 충분하지 않아 시공자 해지 결의의 효력이 문제 될 수 있어 일단 효력을 정지한다는 판단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손해배상 책임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예상되는 손해배상액의 규모까지 개략적으로 산출하여 통보했어야 한다는 취지까지 보태졌다. 해당 조합 역시 손해배상의 위험 및 예상되는 손해배상의 규모에 관한 통지를 전제로 해지 결의를 반복하여야 했음은 물론이다.

시공자의 교체는 가장 중요한 협력업체를 변경하는 것이고 조합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으니 가급적 신중하게 결정하여야 한다는 재판부의 속내가 읽힌다. 하지만 이러한 법원 판단에는 법률과 사실 양 측면에서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우선 법률적 측면. 가처분 결정은 조합원들이 ‘손해배상의 위험’을 모르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해지에 관한 의결권의 행사는 해지에 따르는 위험을 알고 있어야 유효한데 그러한 위험을 고지받지 못해 조합원들의 해지에 관한 의결권 행사가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법률의 부지를 재판부가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데 근본적 문제가 있다. 도급계약 해지에 손해배상의 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법률’에 규정된 것이고 법률의 내용은 다들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각종 법률행위가 이루어지기에 설령 누군가 나는 그런 법이 있는지 몰랐다며 ‘법률의 부지’를 주장해도 결코 보호받을 수 없다. 법률의 부지를 근거로 의결권 행사의 효력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더구나 손해배상 책임의 존부나 구체적인 손해배상의 규모는 법률전문가들의 치열한 공방을 거친 후 재판부의 종합적 판단에 의해 사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조합이 미리 개략적으로 계산해서 조합원들에게 통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음 기고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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