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자 등 협력업체 선정 과정에서 투명성을 제고하고자 도입·시행 중인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에 대한 부실규정 논란이 일고 있다. 일반 협력업체를 선정할 경우에도 보증금을 요구하는 등 제도 도입 취지가 왜곡되면서 허술한 규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제도는 지난 2018년 제정된 이후 조합이 시공자를 선정할 때 현설보증금 요구를 막겠다는 취지에서 지난해 말 한 차례 개정됐다. 그런데 개정 이후 일부 조합은 시공자가 아닌 변호사 등 일반 협력업체를 선정할 때도 마찬가지로 입찰보증금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조합은 시공자 선정시 현설보증금 요구를 금지시켰더니 되레 수백억원에 달하는 입찰보증금을 내걸면서 건설사들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픽=홍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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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협력업체에 입찰보증금 요구하는 부작용 발생


정비사업에서 협력업체 선정 방법과 절차 등 기준을 명시한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이 허술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당초 계약업무 처리기준은 조합이 건설사에 현설보증금을 요구할 수 없도록 중점을 두고 개정됐다. 하지만 입찰보증금 근거 규정이 시공자 선정이 아닌 일반 계약 처리기준이 명시되면서 협력업체를 선정할 때 보증금을 걸고 있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12월 16일 개정·시행된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에 따르면 사업시행자 등이 입찰 참가 업체에 입찰보증금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생겼다. 개정 취지는 현장설명회 당시 건설사들에게 보증금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중점을 뒀다. 이에 따라 시공자 선정 기준에 입찰보증금 관련 규정을 신설했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당시 계약업무 처리기준 개정을 위해 연구용역에 나선 주택산업연구원 역시 입찰보증금 규정을 시공자 선정 기준인 제31조의2항으로 신설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일반 협력업체 선정 시 적용하는 일반 계약 처리기준에 관련 규정이 명시됐다. 조합이 협력업체 선정시 모든 업체에 입찰보증금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정비업체 등 비교적 규모가 큰 협력업체에게 입찰보증금을 요구해왔던 사례가 일반 협력업체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 경우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업체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짜고 치기’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실제로 개정 기준이 시행된 이후 협력업체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를 낼 때 보증금을 명시한 사례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먼저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한 가로주택정비사업장은 법무사와 공동시행자(C.M) 등을 선정하면서 입찰보증금으로 5,000만~1억원을 내걸었다. 인근 가로주택정비사업장 역시 법무사와 공동시행자 입찰 조건으로 동일한 보증금을 명시했다. 심지어 조합 입장을 변호하는 변호사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를 내면서도 보증금을 책정한 사례가 나왔다. 은평구 한 재건축사업장은 변호사 선정을 위해 견적서 금액의 10%를 입찰보증금으로 내걸었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창원시 한 재건축조합은 구조감리 용역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입찰 조건으로 입찰보증금 5,000만원을 납부해야 한다는 규정을 명시했다.

[그래픽=홍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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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설보증금 금지시켰더니, 수백억원대 과도한 입찰보증금 요구… 건설사들의 입찰 참여 문턱 높여놔


일부 조합들은 시공자 선정시 과도한 입찰보증금을 요구하면서 경쟁을 막고 있다는 의혹도 나온다. 당초 현설보증금은 조합과 건설사가 담합의 도구로 악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따라 현설보증금 요구 자체를 금지시켰지만, 이번에는 과도한 입찰보증금으로 건설사들의 입찰 참여 문턱을 높여 경쟁이 성립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시공자 선정에 나선 서울 노원구 A재개발사업장은 시공자 선정을 위한 입찰보증금으로 400억원을 책정했다. 총 공사비는 2,903억원으로 13%가 넘는 금액을 입찰보증금으로 책정한 것이다. 이곳 입찰에는 건설사 1곳이 참여하면서 재입찰공고를 준비 중이다.

사업대행자 방식으로 재건축을 추진 중인 서울 서대문구 B사업장 역시 시공자 선정을 위한 입찰공고를 내면서 보증금 500억원 납부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곳 총 공사비는 약 4,000억원 규모로, 입찰보증금이 12%이상을 차지한다.

통상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할 수 있는 입찰보증금은 최소 5% 수준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과도하게 입찰보증금을 책정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입찰보증금 책정 한도 기준을 정해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규모와 건립 가구수에 상관없이 정한 막대한 입찰보증금이 건설사들의 경쟁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픽=홍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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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 납부 순 따라 기호순번 배정?… 입찰마감 5일 전 보증금 납부 요구 금지 불구, ‘선납’ 경쟁 벌어지면서 제도적 허점 악용되기도


이 가운데 서대문구 B사업장의 경우 제도적 허점이 드러나면서 입찰 절차가 적법한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부 건설사들이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에 납부 기한을 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입찰보증금 500억원을 미리 선납했기 때문이다.

이 사업장은 지난달 21일 시공자 선정을 위한 현장설명회에 건설사 7곳이 참석했다. 문제는 현설 당일 D사와 L사 두 곳이 입찰보증금 500억원을 납부했다는 점이다. D사의 경우 현설을 시작하자마자, L사는 현설 직후 각각 보증금 500억원을 납부했다. 이는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에 위배된다는 논란으로 이어졌다.

현행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 제10조의2제3항에 따르면 “사업시행자 등이 입찰에 참가하려는 자에게 입찰보증금을 납부토록 하는 경우에는 입찰마감일부터 5일 이전까지 납부를 요구해선 안된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위법’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대다수 변호사들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계약업무 처리기준에는 5일 전 입찰보증금 납부를 요구할 수 없는 주체를 ‘사업시행자 등’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즉, 건설사의 자발적인 입찰보증금 ‘선납’을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집행부가 현설 당일 배포한 입찰지침서에 ‘입찰보증금 납부 순으로 기호순번을 배정한다’는 내용을 명시하면서 논란을 키웠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통상 기호순번은 접수순이나 추첨을 통해 배정하는데, 건설사 입장에서는 기호 1번을 받기 위해 보증금 납부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건설사들이 제도적 허점을 이용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사전에 법률자문을 거쳐 절차상 하자가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보증금을 미리 납부하는 꼼수를 부렸다는 의혹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계약업무 처리기준 재개정을 통해 보증금을 요구하거나 제출할 수 없도록 명확한 규정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사업장 규모와 입찰보증금 납부 시기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 마련을 통해 절차상의 문제 및 분쟁으로 인한 사업지연 요소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혁기 기자 lee@ar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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