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구역 지정을 다투는 소송이 유행했던 때가 있다. 이른바 ‘노후·불량건축물인지’에 관한 다툼이었다.

당시 행정청은 ‘준공 후 20년이 지난 건축물’을 곧 ‘노후·불량건축물’로 보아 해당 지역에 일정비율 이상 이러한 건축물이 밀집되어 있으면 정비구역 지정처분을 내렸다.

도시정비법이 ‘철거가 불가피한 건축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건축물’을 ‘노후·불량건축물’로 정의하고, 시행령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건축물이란 준공 후 20년이 지난 건축물을 말한다’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비구역 지정이 위법한 것인지를 두고 수차례 소송이 제기되어 온 것이다.

행정청의 입장은 이러했다. 법에서 ‘철거가 불가피한 건축물’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규정해 놓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위임했으므로, 시행령에서 정한 ‘준공 후 20년이 경과’하기만 하면 그로써 곧 법에서 정한 ‘철거가 불가피한 건축물’에 해당한다는 것.

따라서 준공 후 20년이 경과했는지만 살펴서 정비구역 지정처분을 하면 되는 것이지, 별도로 철거가 불가피한지 여부를 살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정비구역 지정을 다투는 토지등소유자쪽은 비록 준공 후 20년이 경과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철거가 불가피한 상태는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철거가 불가피한지 여부를 별도로 따져 노후·불량건축물인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어떤 견해가 타당할까?

하급심 판례는 행정청의 논리에 따른 것과 토지등소유자의 논리에 따른 것으로 갈렸다. 그러나 결국 대법원은 준공 후 20년이 경과하기만 하면 그로써 곧 철거가 불가피한 건축물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철거가 불가피한지까지 검토한 후 노후·불량건축물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준공 후 20년의 경과’는 ‘철거가 불가피한지’를 판단함에 있어 노후·불량화의 징표가 되는 여러 기준 중 하나라고 본 것이다. 이처럼 대법원이 ‘하위법령에서 정한 요건을 만족하더라도 그것이 곧 상위법령이 정한 요건의 만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상위법령의 요건도 충족하여야 하는 것’으로 정리하면서 그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결과 철거의 불가피성에 대해 입증하지 못한 조합의 경우에는 정비구역 지정이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흘렀다.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 흘렀는데 행정청의 관행만은 변하지 않는 걸까. 정비구역 해제에 있어서도 데자뷔가 일어난다. 도시정비법이 ‘정비구역등의 추진상황으로 보아 지정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 정비구역을 직권으로 해제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에 다른 구체적인 기준 등을 조례에 위임하자, 몇몇 지자체에서 조례에 ‘정비구역 지정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란, 국·공유지를 제외한 토지면적의 2분의 1 이상의 토지소유자의 동의로 정비구역 해제를 요청하는 경우를 말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해당 지자체들은 이러한 내용으로 조례를 개정하기가 무섭게, 조례의 요건만 만족하면 정비구역 지정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정비구역을 해제하는 처분을 내렸다. 주로 넓은 면적의 상가 소유자들이 사업에 반대한 결과이다. 조합원 수로는 과반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이 소유한 토지면적이 국·공유지를 제외한 정비구역 토지면적의 2분의 1 이상이라는 이유였다.

정비사업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면,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만한 대목이다. 소유한 토지면적과 상관없이 조합원에게 평등한 의결권을 부여하는 도시정비법상 일단 조합설립이 된 후에는 ‘조합원 수’가 아닌 ‘토지면적’을 기준으로 동의율을 산정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도 조합이 설립되고 사업시행인가까지 받은 상황에서 넓은 면적을 보유한 소수의 토지소유자가 사업에 반대한다고 한들 사업 진행에 큰 지장이 있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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