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진을 뽑는 선거에서 사전투표용지에 투표자의 인적사항을 적도록 한 조합이 있다. 우리 조합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총회에 참석할 수 없는 조합원들을 위해 안건에 대한 찬반을 묻는 서면결의서와 임원진 선출을 위한 투표용지를 함께 우편 발송하면서 1장의 종이에 앞뒤로 서면결의서와 투표용지를 인쇄하고 앞면 서면결의서에 투표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을 기재하도록 하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뒷면 투표용지에 이름을 적지 않더라도 투표자의 신원이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아예 투표용지 자체에 신상을 적도록 한 조합도 있다. 조합의 관행,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무기명 비밀투표의 원칙=서울시 정비사업 표준선거관리규정은 “선거는 기표방법으로 하며, 무기명 비밀투표로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대부분의 조합이 정관, 선거관리규정 등에 무기명 비밀투표의 원칙을 정하고 있으며 설사 규정이 없더라도 기명투표를 허용하는 규정이 없는 이상 무기명투표가 원칙이라고 봐야 한다. 비밀투표는 자유롭고 공정한 의결권 행사를 위한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기명 투표용지를 사용한 선거의 효력=하급심이기는 하나 법원은 다른 하자가 없는 이상 기명 투표용지를 사용한 것 자체로 해당 표 또는 임원선임총회 결의를 무효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조합이 임시총회 개최통지에 첨부하여 보낸 서면결의서, 서면결의서 회신용 봉투, 투표용지에 동일한 일련번호가 기재되어 있는 사안에서 서면결의서에 의한 투표를 허용하는 이상 중복투표를 방지하고 의결정족수 충족 여부를 정확하게 집계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조치이므로 그러한 사정만으로 무기명 비밀투표의 원칙이 침해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2015.5월).


서울고등법원 역시 조합원들이 서면결의서 및 서면투표용지에 자필로 자신들의 주소와 이름을 기재하고 서명날인한 사안에서 조합원들의 투표에 대한 의사표시가 왜곡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선거관리규정을 준수하지 아니한 서면결의서 등이 사용된 것만으로는 조합장 선출을 위한 선거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침해되었다고 할 수는 없어 결의를 무효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2015.4월). 


서울시 재생협력과도 성북구청의 질의에 대해 부정선거 방지 등을 위해 투표용지에 선거인을 기재하고 서명하도록 한 투표용지의 효력은 ‘선거관리규정 운영과 관련하여 유권해석이 필요한 경우 조합 선관위에서 선관위원의 의견을 취합하여 의결한다’는 조항에 따라 해당 조합 선관위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밝혔다(2016.8월). 


하급심 법원들은 비교적 일관적인 판단을 내놓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기명 투표용지로 인한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 같다. 반장선거에서 짝꿍을 안 뽑은 게 들통나면 우정에 금이 갈 것이 뻔하기에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고개를 푹 숙이고 팔로 한껏 책상을 가려가며 누군가의 이름을 적었던 우리다. 선거에 불복하는 쪽에서 그냥 지나갈 리 없다.


또한 대부분 직접 참석보다 서면결의서 참석이 많기 때문에 선거 전체가 기명투표화되었다고 볼 수 있고 워터마크나 암호화 넘버링 같이 비교적 싼 가격으로 위·변조, 중복집계를 방지할 수 있는 다른 기술적 방법이 있다는 점에서 상급심이 다른 판단을 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위험을 안고 기명 투표용지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민경 변호사 / 법무법인 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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