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1주년 | 공사비 급등→공사 중단→자금 경색→조합임원 해임]악순환 끝에 악수만 둔다
공사비 급등에 조합-시공자 간 갈등 증가 협상 난항에 공사 중단 사태까지 발생해 건설경기 침체 장기화로 건설사 ‘칼바람’ 협력업체도 자금경색에 몸집 줄이기 나서 불가피한 사업지연에도 조합 책임론 부상 조합장 등 임원 해임에 되레 사업 장기화
“작년에는 어떻게든 버텼는데 올해가 더 걱정이네요. 공사비 인상 문제로 사업이 중단되거나, 시공사를 찾지 못하는 조합도 있어요. 사업이 진행돼야 용역비용을 받을 수 있는데 현재는 무료 봉사하는 수준입니다. 불가피하게 직원도 줄이고, 감축 운영을 하는데도 회사 경영이 쉽지 않네요.” -A정비사업전문관리업체 대표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 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최근 수년째 공사비가 대폭 인상되고 있는데다, 주택시장 침체까지 겹치면서 사업추진이 녹록치 않은 탓이다. 공사비 급등으로 인해 조합과 시공자 간의 갈등이 발생하고, 갈등은 사업 중단이나 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비사업이 지연되면서 협력업체들의 자금줄도 막히고 있고, 조합원들은 조합 책임을 물어 임원을 해임하는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악수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조합 VS 시공자’ 공사비 갈등으로 공사 중단 등 사업 지연… 시공자 교체도 실효성 낮아
공사비가 급증한 수년 사이 공사를 중단한 사례는 수차례 발생했다. 무려 1만2,000세대에 달하는 공사로 ‘역대 최대 규모 재건축’으로 불리는 둔촌주공의 공사가 중단된데 이어 대규모 재개발사업장인 은평구 대조1구역도 재개발 공사가 멈춰선 바 있다. 또 지난해에는 청담삼익 재건축과 이촌현대 리모델링, 장위4구역 재개발 등도 공사 중단을 예고하기도 했다.
공사비 증액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지면서 사업도 지연되고 있다. 그동안은 조합이 공사비 인상에 합의하더라도 분양가가 상승하면 손해를 상쇄하는 것이 가능해 사업 추진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공사비가 급격하게 상승한 것에 더해 미분양 물량 증가로 인해 주택시장마저 침체된 상태다. 즉 분양가가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비가 인상되면 피해는 조합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서울 강남권 등 일부 지역에서는 미분양 우려가 적고, 분양가격도 비교적 높게 형성되어 공사비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들은 시공자의 공사비 인상 규모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일부 조합들은 ‘시공자 교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공자를 선정하더라도 실질적인 이익은 크지 않다. 기존 시공자와 비교하면 공사비 인하 효과가 거의 없거나, 되레 높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공자 선정 절차를 거치면서 사업이 지연되는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사업 장기화로 ‘돈맥경화’ 현상 발생… 시공자는 물론 협력업체들도 감원·감축
사업 장기화로 인한 피해는 조합원은 물론 시공자나 협력업체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정비사업이 정체되면서 공사비나 용역비용을 받지 못하는 ‘자금 경색’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건설사들은 지난 2022년부터 최근까지 임원은 물론 임금까지 줄여가고 있는 상황이다.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삼성물산을 제외한 10대 건설사의 미등기 임원은 지난 2022년 3분기 511명 대비 12% 이상 줄어든 44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DL이앤씨의 경우 이미 지난해 3월 대표이사를 포함한 임원 18명을 해임했으며, SK에코플랜트도 10월 17명의 임원을 해임했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해 6월 임원 급여를 최대 15% 삭감하고, 직원 임금은 동결을 결정했다. 대우건설도 기본급의 50%를 지급하는 2개월 유급휴직제를 시행하고, 장기근속이나 고연차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다. 또 한화 건설부문은 임원과 팀장급 이상의 직급 수당을 30% 삭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은 정비업체나 설계사 등 협력업체도 마찬가지다. 대형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로 평가되는 회사에서 감원 바람이 불고 있고, 설계업체들도 신입사원 채용 규모를 대폭 축소하거나, 취소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일부 설계업체의 경우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건설사나 협력업체들의 수익이 줄어들면서 조합들도 사업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견사를 시공자로 선정한 지방의 정비사업의 경우 벌써부터 대여금 중단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대전의 한 재개발 조합은 당초 시공자가 대여키로 한 사업비용을 지급 받지 못하고, 사업 추진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만을 검토 후 대여 받고 있다. 또 수도권의 한 소규모재건축도 시공자가 운영비와 사업비를 지원하지 않아 계약해지 절차를 진행하기도 했다.
결국 ‘시공자→조합→협력업체’로 이어지는 순환구조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돈맥경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비사업 지연, 조합 잘못이 아닌데… 조합장 등 조합임원 해임 사례 급격히 증가
재건축·재개발이 지연되고, 공사비 인상 등으로 사업성까지 하락하자 조합임원에게 화살이 돌아가고 있다. 조합 입장에서는 주택시장 침체와 시공원가 상승 등으로 불가피한 선택을 하고 있지만, 조합원들의 불만은 커져만 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부동산 경기가 꺾이면서 지방은 물론 서울에서도 조합장을 비롯한 조합임원 해임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부터 조합임원을 해임했거나, 해임절차를 준비하고 있는 구역이 최소 20곳 이상이다. 시공자를 선정하지 못해 사업이 지연되거나, 공사비가 크게 늘자 ‘조합 책임론’을 내세워 해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해운대의 B재건축구역의 비대위는 조합장 해임을 위한 총회를 열고, 해임 안건을 통과시켰다. 비대위 측은 공사비가 급등한 것은 물론 계약서상 불공정 조항이 많다는 이유로 조합장을 해임하고, 새로운 시공자를 선정하겠다는 계획이다.
남구의 C재개발구역도 조합장 해임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공사비 인상 등으로 사업성이 떨어지자 조합장 해임에 나섰고, 조합장은 무효 등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부산진구의 D재개발구역도 작년 4월 시공자 선정과 관련한 조합장의 비리를 주장하며 해임 총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조합장 측은 총회의 의사정족수에 문제가 있었다며 가처분신청 등 법적 대응에 나섰다.
비교적 시장 상황이 양호한 서울에서도 해임이 이어지고 있다. 공사가 중단됐던 대조1구역 재개발도 조합장을 비롯한 임원 전원이 해임됐고, 상계2구역도 지난해 4월에 이어 지난해 9월에도 조합장 해임을 결정했다. 해당 구역들 모두 공사비 인상을 두고 조합원들이 반발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강남권에서도 방배7구역이 재건축 시공자 선정을 앞두고 지난해 10월 조합장 해임 안건이 통과됐다. 조합장은 해임 효력 여부에 대해 법적 절차에 나선 상황이다.
엄정진 한국주택정비사업조합협회 사무국장은 “최근 공사비 인상폭이 커지면서 조합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오른 구역들이 적지 않다”며 “조합 입장에서도 공사비 인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업이 장기화하고, 공사비가 오른 것은 시장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라며 “조합장 등 일부의 책임으로 전가해 해임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만큼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심민규 기자 smk@ar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