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정비사업을 진행할 때 아파트 한 동의 전체나 일부, 동네 골목길, 허름한 주택들을 통째로 남겨둬야 한다면 선뜻 이해가 될까요? 서울시는 역사·유산을 남겨야 한다는 명목으로 재건축사업장에 이어 재개발사업장으로까지 노후 건축물에 대한 보존 정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시는 관리처분인가 전 단계에 해당하는 재개발사업장 101곳을 대상으로 역사 남기기를 추진하면서 생활문화 유산을 보존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이중 20곳은 심층 조사지역으로 분류해놨습니다. 조사 이후 대상지역의 주요 문화재, 근현대 건축, 조경요소, 골목길 등을 따로 관리하겠다는 게 핵심입니다.


시의 역사·유산 흔적 남기기. 이름도 좋고 명분도 좋습니다. 하지만 근현대식 건축물을 역사·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다는 점은 크게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유산’이 아닌 ‘흉물’로 전락하면서 단지 전체의 미관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죠.


예컨대 시가 보존하겠다는 노후 건축물은 70~80년대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들어선 성냥갑 모양의 주공아파트가 대부분입니다. 향후 첨단 시설을 갖춘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 시점에서 미래유산으로 남기겠다던 노후 건축물이나 골목길 등에 대한 구체적인 관리 방안도 없습니다.


인·허가권 등 공권력 남용에 대한 지적도 나옵니다. 시는 흔적 남기기를 권고하고 유도하겠다지만, 아파트 1개동을 남기기로 한 재건축사업장 모두 인·허가를 조건으로 흔적 남기기를 받아들였습니다.


실제로 시는 잠실주공5, 개포주공4 등의 재건축사업장에 아파트 1개동에 대한 보존을 정비계획에 반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아파트 내 아궁이 등을 보존하도록 해서 후세에 현대 생활환경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게 핵심입니다. 그리고 보존할 곳은 일종의 주민 공동체 시설, 문화공간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주민들에게 맡겼습니다. 결국 인·허가권을 앞세워 사유재산 보존을 요구했고 사용 용도는 주민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인데, 이러한 공권력 남용 정책은 재개발사업장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한옥도 아닌 오래된 시멘트 덩어리를 역사·문화 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시민들에게 보존을 강요하는 서울시.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이혁기 기자 lee@ar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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