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대법원은 정비구역 내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조합원이 각종 행정소송을 제기함과 동시에 이를 이유로 조합원으로서 부담하는 이주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해당 조합원은 사업지연에 따른 손해를 조합에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바 있다.

그런데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이주의무를 회피하려는 것 외에, 조합이 제기한 명도소송에서 부동산 인도를 명하는 가집행선고부 판결이 선고되었음에도 피고가 이에 불복하는 취지로 강제집행정지를 신청하고 신청이 인용됨으로써 부동산 인도 강제집행 시도가 무산되었다면, 이러한 방식의 이주지연 행위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될 수 있을까.

법원은 재판제도의 이용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소행위나 응소행위가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히 판단하려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이러한 취지에서,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에 응소하는 행위가 위법성을 띠고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보려면, 소제기나 응소행위가 권리실현이나 권리보호를 빙자하여 상대방의 권리나 이익을 침해하거나 상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려는 의사로 행하여지는 등 고의·과실이 인정되고, 그것이 공서양속에 반하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조합의 명도소송에 대응하거나 1심 판결에 대한 불복의 일환으로 강제집행정지 신청을 하는 것 역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응소행위로 볼 수 있다. 즉 이주지연 행위를 불법행위로 보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명도소송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소송행위들이 조합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거나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려는 의사로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도소송에 대한 응소행위가 조합을 괴롭히기 위한 의사로 행해졌다는 것을 소송에서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다.

여기까지 보면, 부동산을 인도하지 않은 행위가 명도소송에 대한 응소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미이주자의 주장을 꺾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손해배상청구권의 법적 권원을 바꾸어 ‘입증책임을 전환’하면,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것은 미이주자이다.

손해배상청구권의 종류는 크게 민법에 따른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과, 계약상 존재하는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채무불이행 손해배상책임’으로 나뉜다. 이때,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귀책사유와 고의 및 과실 등을 입증하여야 하는 반면, ‘채무불이행 손해배상책임’의 경우에는 채무자가 본인에게 귀책사유가 없음을 입증하여야 손해배상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관에 따라 부여되는 이주의무나 매도청구권 행사에 따라 성립이 의제되는 매매계약상 인도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채무불이행 책임’을 묻는 경우, 인도의무 불이행에 관하여 귀책사유가 없다는 점을 미이주자가 입증하여야 하고, 이를 해내지 못할 경우 손해배상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법원은 1심 판결에 불복하면서 강제집행정지를 신청하고 법원이 강제집행을 정지하는 결정을 내린 사실에 기대어 이주를 지연한 사안에서, 종국적으로 명도소송에서 미이주자가 패소하였다면 해당 강제집행정지 결정을 신뢰한 미이주자의 법률적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진 것이므로 이주지연 행위에 고의나 과실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부동산 강제집행이 법원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부동산을 인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채무불이행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광주고법 2021나).

강제집행정지 신청을 활용하여 부당한 이주지연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고자 했던 미이주자는 끝끝내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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