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 조합원 총회라는 최고의사결정기관과 별도로 하위 의사결정기관인 대의원회를 둔 것은 비용과 시간의 경제성 때문이다. 조합이 사업에 관한 의사를 결정할 때마다 조합원 전체를 대상으로 덩치 큰 총회를 매번 개최해야 한다면 그것처럼 비싸고 불편한 일도 없을 테다. 대의원회 제도 덕분에 조합은 간이한 절차를 거쳐 신속히 안건에 관한 의사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대의원회가 시종일관 경제성이라는 가치만 추구하는 건 곤란하다. 총회를 대신해 조합의 의사를 결정할 수 있으려면 대의원회 역시 최소한의 대표성을 갖추어야 한다. 대표성은 모든 대의적 의사결정기관에 대한 당위적 요청이기 때문이다. 대의원회의 정당한 대표성 확보를 위한 입법적 수단이 바로 ‘법정 대의원 수’다. 그리하여 법정 대의원 수에 이르지 못하는 대의원회는 대표성이 부족한 것이고 대표성이 부족한 대의원회에서 형성된 의사는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무리없이 도출된다.  

법정 대의원 수 미달 사태는 다양한 상황에 의해 빚어질 수 있지만 가장 빈번한 원인은 ‘사임’이다. 그러나 일부 대의원들의 사임이 언제나 법정 대의원 수 부족 사태를 빚는 것은 아니다. 

민법 제691조는 위임종료의 경우에도 급박한 사정이 있는 경우 수임인에게 위임사무 처리를 계속하도록 의무를 지운다. 조합과 대의원의 관계 역시 본질적으론 ‘위임관계’이기에 본인의 사임으로 인해 법정 대의원 수에 부족이 생기고 대의원회 기능이 마비될 상황이라면 급박한 사정에 의한 사무처리 계속 의무를 사임한 대의원에게 부과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부 재판부는 민법 제691조에 터 잡은 사무처리 법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임으로 인한 법정 대의원 수 부족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그러나 조합이 해당 법리를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알고도 실제 대의원회 운용에 적극 활용하지 않는다면 가뜩이나 소극적인 역할에 그치는 법원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게 된다. 

대의원 사임으로 인해 법정 대의원 수가 부족하게 된 사안에서 최근 의정부지방법원의 한 재판부는 “사임한 대의원이 대의원회 의결과정에서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보기 부족하고 오히려 의사록에 의하면 조합은 사임한 대의원 수를 전체 대의원 수에서 제외한 채 의사를 진행한 사실이 소명된다”는 이유로 민법 제691조의 적용을 거부하고 사임으로 인해 법정 대의원 수가 부족하게 되었다는 취지로 판단하였다. 

조합으로서는 상당히 야속한 결정이다. 민법 제691조를 근거로 ‘사임한 대의원에게 사무처리 계속 의무가 인정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급박한 사정’의 존재 여부에 달린 것이고 당장 대의원회의 기능이 마비되는 사정은 급박한 필요성을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당 재판부는 상황의 급박성이 아니라 사임한 대의원이 의결과정에서 대의원으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는지, 조합은 사임한 대의원을 전체 대의원 수에 포함하여 의사를 진행하였는지를 따져 물은 후 그러한 사정이 없다는 이유로 민법 제691조의 적용을 거부하였다. 

사안 해결의 신속성이 강조되는 가처분 결정이라는 걸 감안해도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객관적으로 상황의 급박성이 인정된다면 조합이나 사임한 대의원의 처신과는 무관하게 민법 제691조를 적용해 주어야 옳다. 어찌됐든 조합이 법정 대의원 수 부족 상황에서 사임한 대의원과 일반 대의원을 달리 취급하면 민법 제691조에 관한 법원 설득이 어려워질 수 있음을 명심하자.

박일규 대표 변호사 / 법무법인 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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