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사직2구역 일대는 정비사업이 중단된 이후 지반침하로 인해 노후주택 곳곳에 대한 붕괴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이혁기 기자]
서울 종로구 사직2구역 일대는 정비사업이 중단된 이후 지반침하로 인해 노후주택 곳곳에 대한 붕괴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이혁기 기자]

“그토록 정비사업이 빨리 진행되길 바랐건만,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시는 사직2구역 직권해제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정비사업 중단에만 행정력을 집중시켜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도시환경정비사업은 장기간 방치돼오고 있고, 결국 사람이 살고 있던 주택에서 지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당시 잠시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현재 취재에 응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서울 종로구 사직2구역 내 주민 A씨의 말이다. A씨는 지난 11일 오후 4시경 집 근처 마트에 식초를 사러 잠시 외출에 나섰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4시 20분. 불과 20분 사이 A씨의 집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지붕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 구조물과 기둥들이 무너져 내렸고, 살림살이들은 모두 흙더미에 파묻혀버렸다. 만약 A씨가 외출하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지난 11일 오후 4시. 구역 내 한 노후주택 지붕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집으로, 자칫 인명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사진=이혁기 기자]
지난 11일 오후 4시. 구역 내 한 노후주택 지붕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주민이 거주하고 있던 집으로, 자칫 인명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사진=이혁기 기자]


주택은 약 1년 전 A씨가 직접 사비를 들여 지붕 등에 대한 보수공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반이 서서히 침하하면서 안방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구조물이 붕괴됐다는 게 A씨의 설명이다. 현재 안방 살림살이는 붕괴된 지붕 구조물 밑으로 묻힌 채, A씨는 바로 옆 작은방에서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붕괴된 노후주택 안방 입구는 지붕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기둥과 흙더미 등 잔재물로 막혀 있어 지나갈 수조차 없는 상태다. [사진=이혁기 기자]
붕괴된 노후주택 안방 입구는 지붕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기둥과 흙더미 등 잔재물로 막혀 있어 지나갈 수조차 없는 상태다. [사진=이혁기 기자]


A씨는 “잠시 마트에 다녀와 집안을 살펴본 순간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며 “TV와 냉장고, 밥솥, 주방용품 등 살림살이들이 모두 나무와 흙더미에 깔려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가 왜 정비사업을 중단시키려고만 하는지 모르겠다”며 “만약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됐더라면 주택이 붕괴되는 상황을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현재 종로구는 붕괴된 노후주택에 대한 안전점검 및 A씨의 임시거처 마련을 검토 중이다. 김진철 종로구청 도시개발과 팀장은 “구는 붕괴된 건축물이 굉장히 위험한 상태로 판단하고 사용중지 처리 후 소유자에게 퇴거를 요청했다”며 “후속조치로 전문가와 함께 안전점검에 나선 후 A씨의 임시거처 마련도 검토 중이다”고 밝혔다.


문제는 사직2구역은 무너진 A씨 소유의 노후주택 외에도 곳곳이 붕괴 위험에 처해있다는 점이다. 

노후주택은 약 1년 전 집주인이 사비를 들여 지붕 등에 대한 보수공사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반침하로 인해 폭우가 오던 날 지붕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사진=이혁기 기자]
노후주택은 약 1년 전 집주인이 사비를 들여 지붕 등에 대한 보수공사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반침하로 인해 폭우가 오던 날 지붕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사진=이혁기 기자]


실제로 구역 내 가옥 1/3 이상이 붕괴 위험에 노출돼있다. 이중 일부 주택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상당수는 공가로 방치돼있다. 모두 지붕이 무너진 채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모습이다. 


사직2구역 일대는 수년째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지체되고 있는 동안 지반침하가 발생했다. 곳곳에 위치한 노후주택들은 이미 무너져 내렸거나, 붕괴 위험이 큰 상태다. 주인이 없는 일부 주택은 쓰레기더미들이 가득 쌓여있다. 주민들은 날씨가 더운 여름이면 악취도 진동한다고 하소연한다.


주민 B씨는 “이곳에서 시가 소규모 도시재생을 추진하겠다고 하지만 지반침하가 발생하고 있어 보수·보강이 이뤄져도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다”며 “전면철거를 통한 기존 정비사업 추진만이 주거환경 개선은 물론 주민들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고 말했다.


그동안 사직2구역은 원만한 사업 추진을 바라는 주민의사와 달리 역사·문화 보존과 소규모 도시재생에 치중된 지자체의 편파행정으로 인해 지지부진하게 흘러왔다.


이곳은 주민들의 바람대로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추진돼왔다. 2010년 5월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후 2012년 사업시행인가까지 받았다. 그런데 이듬해 소형평형으로의 입주를 원하는 주민들이 많아 구청에 설계변경을 골자로 사업시행변경인가를 신청한 것이 화근이 됐다. 당시 한양도성 복원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던 시는 종로구청에 사직2구역 사업시행변경인가 연기를 요청했다. 


이후 2017년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사·문화 보존을 이유로 직권해제 됐다. 조합은 소송을 제기했고, 1·2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시 직권해제가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시가 역사·문화 보존이 필요한 곳은 직권해제 할 수 있다는 조례 규정이 상위법인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위임 권한을 뛰어넘었다고 판단했다.


조합은 지난 6월 22일 임원선출을 골자로 한 임시총회를 개최해 상정된 안건들을 모두 의결했다. 당시 총회에서 기존 이사직을 수행해왔던 장진철씨를 조합장으로 선출했고, 감사와 이사 등 집행부를 재구성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과 집행부 재구성에도 불구하고 사직2구역의 도시환경정비사업 재개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종로구청이 조합설립변경인가 등 행정지원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 조합장 당선자는 “종로구가 서울시의 눈치만 살피면서 조합설립변경인가를 미루고 있다”며 “시와 구청은 소규모 정비사업만 고집할 게 아니라 안전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기존 정비사업 재개를 위한 행정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지 약 9년. 주민들은 지자체가 사법부의 판단과 법령 체계도 모두 무시한 채 구역해제 및 도시재생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이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한편, 조합에 따르면 사직2구역은 시 직권해제 이후 370억원에 달하는 매몰비용이 발생했다. 조합은 시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혁기 기자 lee@ar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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